'흙수저 소년공', '비주류', '변방의 장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늘 '주류'와는 거리가 멀답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 후보는 가난한 10대 시절을 주로 공장에서 보냈다. 노동을 하다 기계에 팔이 끼여 영구장애를 입었고, 화학약품에 심하게 노출돼 냄새를 잘 못 맡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변변치 못한 형편에 교복도 한 벌 제대로 입지 못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모두 검정고시로 마쳐야 했다.
그의 측근 입을 빌리자면 "찢어지게 가난했던" 유년 시절은 오히려 정치인 이재명에게 근성과 승부욕을 주는 동력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쏟아지는 잠을 쫓으려 책상 위에 압정을 뿌려가며 독하게 학력고사를 준비한 끝에 이 후보는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한때 판·검사의 길을 고민하기도 했던 이 후보는 연수생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도 세 끼 굶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한 강연을 듣고 인권변호사로 인생의 진로를 굳혔다고 한다. '노동자의 도시' 성남으로 돌아온 이 후보는 1989년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고, 1994년 성남시민모임(현 성남참여연대) 창립에 참여하며 시민사회운동에 발을 들였습니다.
2004년 성남시립의료원 건립 운동을 벌였는데, 주민 2만명의 동의를 받았음에도 당시 한나라당이 다수였던 성남시의회의 반대로 의료원 건립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 후보는 이 사건이 자신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밝히고 있다. 이듬해인 2005년 그는 열린우리당에 입당,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한차례 낙선한 뒤 2010년 민선 5기 성남시장 선거에서 마침내 51.2%의 득표율로 당선돼 본격 정치인의 여정을 시작한다.
당선 후 전임 시정에서 늘어난 빚을 갚기 위해 지방정부 최초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3년 만에 부채 4572억원을 다 갚았다. 결국 2014년 55.1%의 득표율로 성남시장 재선에 승리한 그는 '청년배당, 산후조리, 무상교복'으로 대표되는 3대 무상복지를 실현하는 등 지방정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 주목받았다.
2017년 대선 출마 이후 전국구 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린 이 후보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 56.4%를 득표하며 제35대 경기도지사로 취임했다. 성남시장부터 경기지사 시절까지 지역화폐를 대중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 잘하는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각인시킨 이 후보는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승리한 뒤 민주당 대표로서 당권을 틀어쥔 뒤 어느새 중앙정치의 중심부로 들어왔답니다.
20대 대선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에 패배한 점은 뼈아픈 과거이긴 하지만 심기일전하는 모양새다.
이번 21대 대선에선 성장과 실용 강조하는 중도 보수적 색채가 뚜렷한 공약을 제시하며 중도층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진보적 색채는 덜어내고 실용주의나 중도·보수 노선을 더 확보해 외연을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이른바 '보수 책사'로 불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총괄선대위원장을 맡은 것은 상징적이다.
선대위는 계파와 진영을 초월한 '매머드급 선대위'로 꾸려졌다. 선거대책위원장단만 22명에 달할 만큼 큰 규모다.이 후보와 당내 경선에서 경쟁한 '친문(친문재인) 적자' 김경수 전 경남지사도 총괄선대위원장직을 맡았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정은경 전 질병관리청장, 김부겸 전 국무총리,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등도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윤석열 캠프' 출신인 이인기 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의원과 이명박 정부에서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전 처장, 이명박 정부에서 특임대사로 활동했던 보수 진영 인사인 신재현 전 에너지자원협력 대사도 캠프에 합류했습니다.